조문희의 뒷북

햄버거 말고, 기적의 기적의 기적 -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마이클 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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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말고, 기적의 기적의 기적 -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마이클 최

moony1217 2019. 5. 30. 03:45

  ‘입좌파’라는 말을 글자로 읽는 것조차 싫어하는 나지만 친구들을 보며 꼭 한 번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2학년이던 2008년, 광화문 광장에선 소위 ‘광우병 집회’가 한창이었다. 광우병이 실재하는 질환이냐는 데 친구들은 저마다 생각이 달랐다. 누군가는 ‘그런 병 없다더라’고 말하는 반면 ‘입증됐다’고 소리 높이는 사람이 있었다. 혹자는 ‘그래도 시민이 불안해하면 일단 수입을 멈춰야하는 거 아니냐’며 제3의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모두가 동의하는 쟁점이 있었다. 적어도 집회에 나온 시민을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불만을 토로하던 친구들은 네이트온에 삼삼오오 모였다. 네이트온은 지금으로 치면 카카오톡과 비슷한 메신저다. 그곳에서 단체채팅방을 연 우리는 짐짓 시국에 관한 심오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집회에 참석해야 하겠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다음 주의 어떤 날 모두가 광장에서 만날 줄 알았다. 전날 한 명이 “시골이 내려가야 한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한 명이 시작한 핑계는 랜선을 타고 쾌속 질주했다. 하나둘씩 차로에 진입하는 이도 늘어났다. 쪽지시험이라는 학생의 본분부터 가족과의 약속 같은 좀체 부정하기 어려운 명제까지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사유가 나왔다. 어느덧 애인과의 데이트라는 일견 가벼운 이유도 어느덧 별 부담 없이 등장하는 지경이 됐다. 그리고 약속 당일, 광장에 홀로 선 나는 사진을 한 장 가볍게 찍고는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정말이지, 놀랍도록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람 많은 광장에서도 얼마든지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출처 : 트위터 ‘짤방백업봇’ https://twitter.com/sxk35/status/1005066463168757761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는 한때 결기로 무장했던 친구들이 약속 당일 뿔뿔이 흩어진 이유를 설명해주는 책이다. 저자인 마이클 최 미국 UCLA 정치학과 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이 아무리 주변 친구들에게 정권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은들 이들이 ‘한날 한시에 광장에 모인다’고 보장할 순 없다. ‘광장에 나가자’는 이야기까지 나눈다 해도 그렇다. 당일에 배신을 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분노했을지라도 혼자 광장에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크게는 공권력에 진압당할까, 작게는 혼자 망신당할까 여겨서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 광장에 나서게 될 때는 다르다. 수가 많으면 경찰이라 해도 손쉽게 제압하지 못한다. 물리적으로 어려운 데다, 미디어의 눈길도 모인 사람의 수 만큼 집회 현장에 도달한다. 그 전에 적어도, 혼자가 아니면 쪽팔리지는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 하나라도 빠질까 민감하게 주변을 지켜본다. ‘빠진다’는 말을 내뱉은 2008년의 한 친구가 모임의 블록을 와르르 무너뜨린 배경이다. 

  그래서 우리가 광장에 나서기까지는 서로에 대한 감시가 여러 겹으로 이뤄져야 한다. 내가 나간다는 말을 네가 들었어야 하고, 네가 내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야 하며, 네가 내 말을 들었다는 걸 내가 알고 있음을 네가 알아야 하고…. 이렇게 앎이 한 꺼풀씩 쌓여가면서(메타지식) 이뤄지는 눈치싸움을 저자는 ‘조정문제’라고 부른다.


 

  조정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다. 일단 내가 조금 더 공개적인, 그리하여 어지간한 핑계로는 참여 의사를 물릴 수 없는 방식으로 선언하는 것. 그때 이를 지켜본 친구는 나의 참여 의사를 더 많이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공개적으로 말했으니 친구도 이걸 봤겠지’라며 예상을 하게 된다. 댓글까지 달린다면 금상첨화. 이렇게 “내가 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고, 당신이 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는 사실을 서로가 아는” 상태를 두고 저자는 ‘공유지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조정문제를 극복하는 유일 해법이지만 공유지식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은 대화, SNS상의 선언, 대자보, 공개선언을 통해 각기 다른 수준의 공유지식을 이룩한다. 뒤로 갈수록 공개의 정도가 크고, 그만큼 신뢰도가 높아진다는 점에서 이들 방식 사이엔 차이가 있다. 그렇게 ‘나 말고도 사람이 모일까’ 두려워하는 개개인의 눈치싸움은 가끔 아슬아슬한 균형에 이른다. 그 균형점의 이름은, 시쳇말로 집회다. 

  흥미로운 것은, 시작되기 어려운 집회가 일단 등장하기만 하면 참여를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책이 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사실만큼 타인의 참여를 확신하게 해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어디 있겠나. 참가자 역시, 집회가 열린 거리를 사람들이 스쳐 가고 언론의 카메라가 길바닥에 모이면서 믿음을 얻는다. ‘내가 나와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안다.’ 그렇게 집회는 일견 자기예언적인 성취를 이룬다. ‘일단 모아라. 그러면 모일 것이다.’


 16일 오후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기획단장이 서울광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광장에서는 6월 1일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출처 : 경향신문


  “퀴어문화축제가 성소수자들이 서로 지지하고 기운을 얻는 행사를 넘어 여러 소수자들이 섞이는 장이 되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광장에서 한채윤 서울퀴어퍼레이드 기획단장이 꺼낸 말이다. ‘무지개2000’이란 이름으로 행사를 시작한 2000년에만 해도 퀴어축제의 참가인원은 50명에 불과했다. 그러던 축제가 지난해엔 10만명이 찾는 공간으로 성장했다. 참여를 두고 벌어지는 눈치게임을 생각하면 좀처럼 믿기 어려운 성공,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또 다른 기적이 벌어졌다. 지난 몇 년 새 퀴어축제에는 이성애자는 물론 장애인,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노동자 집단까지 참여하기 시작했다. 온갖 목소리가 한데 모이는 만큼, 축제의 방향성을 두고 새로운 논쟁까지 벌어진다. 과거 장애인·노동자 등 다양한 인권 문제의 영역에서 ‘우리 중에는 동성애자가 없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반전에 가까운 변화다. 하지만 그 반전이야말로 책이 논증하는 핵심이다. 기적은 또다른 기적을 부른다. 

  억지로 입에 욱여넣었던 2008년 광화문의 햄버거를 생각한다. 그때 배를 채우고 집에 가는 대신, 광장의 사진을 찍고 친구들에게 전송했다면 어땠을까. ‘내일은 함께 나오자’며 말을 건네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가볼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 걸까. 어렸던 내가 하지 못했던 작은 행동을 끝끝내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 있었고, 가까스로 일궈낸 모임 위로 또 다른 형태의 모임이 자랐다. 6월 1일, 서울광장에서는 또 어떤 기적이 벌어질까. 햄버거 말고 기적의 기적의 기적을 꿈꾸는, 오늘은 서울퀴어퍼레이드 이틀 전이다. 


  덧. 한채윤 단장의 인터뷰 기사는 아래 링크를 타고 들어가시면 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94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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