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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게이, 만우절의 슈퍼히어로

moony1217 2021. 4. 2. 18:20

  2014년 어느 새벽 미국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 기념관을 마주본 채 길게 뻗은 호수 주위로 덩치 좋은 흑인 남성이 조깅을 하고 있다.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듯 세상은 어둡고 멀리 워싱턴 기념탑이 보인다. 넓은 호수에 비하자니 남성은 하나의 점처럼 작고 멀리서 보는 세상은 고요하다. 덩치가 더 큰 백인 남성이 그를 몇바퀴 연달아 제쳐 버리기 전까지는. <캡틴 아메리카:윈터솔져>에서 후일 팔콘이 되는 샘과 캡틴, 스티브 로저스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스티브는 70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그는 슈미트 박사의 뉴욕 폭격 계획을 막으려다 세상에서 사라졌다. 싸움 중 조종장치가 고장난 슈미트 박사의 폭격기가 미국에서 터지지 않도록 그린란드로 끌고 갔다가 빙하에 추락해 얼어 버렸다. 얼마 전 실드(Shield)의 국장 닉 퓨리의 발견으로 깨어나긴 했지만 그는 변해버린 세상에 아직 적응은 못했다. 전쟁이 없는 세상, 좀이 쑤시지 않느냐는 샘의 말에 스티브는 자신이 잠들어있던 70년 동안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샘은 웃으며 답한다. "마빈 게이, 트러블 맨(trouble man). 1972년 사운드트랙이지. 네가 놓친 모든 것들이 그 앨범에 다 들어있어."

https://youtu.be/t2E1mLUrBdY

  1939년 4월2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마빈 게이는 음악 생활 내내 동시대 미국 사회의 변화를 드러낸 인물이었다. 1961년 20대 젊은 나이로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의 모타운 레코드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하면서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끈적하고 달콤한 사랑노래 위주인 회사의 풍조와 큰 키, 수려한 외모를 활용해 댄스 음악을 하라는 지침에 불만을 가졌다.

  1971년 내놓은 앨범 <What's Going On>은 그가 본격적인 자기 음악을 시작한 순간으로 평가된다. 음악평론가 임진모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당시 마빈 게이는 베트남 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동생인 프랭키가 월남전에 참전한 것도 영향을 미쳤지만, 켄트주립 대학 학생들이 반전시위를 하다 진압군의 M1 소총에 맞아 죽는 일을 접하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오늘 신문 봤어? 켄트주립대학에서 죽은 학생들에 대한 기사 말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야. 잠도 못자고 계속 울기만 했다니까." 그는 사랑 노래 일색이던 모타운의 풍조에 맞서 사회의식을 담은 음악을 하겠다고 나섰다. 앨범 속 노래 제목부터 "이게 무슨 일이람(What's Going On)", "동생아, 무슨 일이냐(What's Happening, Brother)"였다.

  앨범 <Trouble Man>(1972)도 이러한 그의 관심에서 만들어졌다. 베트남 전쟁은 흑인과 백인이 나란히 전투에 서는 계기였고 미국 내에선 반전시위 못지않게 흑인 인권 운동 규모도 커졌다. 수록곡 'Trouble Man'은 동명 영화의 OST로 쓰였는데, 영화는 당시 흑인 인권 운동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백인이 주로 악당이고 흑인이 주인공인, 흑인을 위한 영화 장르, 이른바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의 일환이었다. 반면 이후에 낸 <Let's Get It On>(1973)은 완전히 다른 색깔 앨범으로 평가된다. 앨범과 수록곡의 제목인 "그거 하자(Let's Get It On)"에서 엿보이듯, 1년 새 마빈 게이는 사회비판을 벗어나 성적 욕망처럼 세속적인 주제를 적극적으로 다뤘다.

 

 

  이를 누군가는 마빈 게이의 '타락'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반전과 평화운동, 성해방과 자유주의의 심화, 인권의식의 제고는 60~70년대 미국에서 서로 동떨어진 주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학생운동과 히피 문화가 뒤얽혔던 당시 시대상을 두고 이들 주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많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서방의 변화를 상징하는 흐름이 마빈 게이 음악 변천사에 담겨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시대를 담으며 승승장구한 음악과 달리 개인으로서 마빈 게이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안나 골디와 1978년 이혼하면서 그는 이윽고 모타운과의 계약마저 해지하게 된다. 안나에게 위자료를 줘야 했지만 이즈음 낸 앨범들이 모두 실패하면서 그는 마약에 중독됐고, 새 출발을 꿈꾸며 하와이로 떠난다. 1982년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낸 앨범 으로 가까스로 재기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1984년 4월1일, 아버지와 어머니 싸움을 말리던 마빈 게이는 어이없게도 분노한 아버지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살해에 쓰인 총은 마빈 게이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버지에게 선물한 것이었고, 하루 뒤인 4월2일은 그가 태어난 날이었다. 폭압적이고 체벌을 즐겨했던 아버지와 안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였다. 모든 게 만우절 거짓말 같은 상황이었다.

  내가 가장 자주 즐겨 듣는 마빈 게이의 노래는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7)이다. 타미 테렐과 함께 부른 이 노래로 그는 빌보드 top20에 진입한 적이 있다. 생후 롤링스톤지가 꼽는 500대 명반에서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생전 수차례 빌보드 핫 100 1위와 10위 사이를 오갔던 그에게 20위 안쪽이 뭐 대단하냐 할 수도 있지만 이 노래는 날이 갈수록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시스터액트2, 스텝맘 등 영화의 OST로도 쓰였다. 최근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에도 등장했는데, 주인공 스타로드가 악당 로난을 물리친 뒤 어머니가 물려준 카세트테이프 '끝내주는 노래 모음집 1(Awesome Mix Vol.1)'을 틀자 흘러 나오는 노래다. 위기를 함께 이겨낸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일상을 되찾는 장면의 배경음으로 쓰인다.

  그러고 보면 'Trouble Man'도, 샘이 스티브에게 소개할 때는 이름만 등장할 뿐 영화 속에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다. 노래가 재생되는 건 영화의 모든 갈등이 해소된 뒤, 스티브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다. 이 장면에서 샘은 아이폰으로 노래를 재생한 채 스티브가 깨어나길 기다린다. 슈퍼히어로 영화 속 마빈 게이의 노래는 그렇게, 깨지고 부딪치며 가까스로 견뎌낸 누군가의 회복을 기다리고 때론 지켜보며 듣는 음악이다. 만우절 거짓말처럼 목숨을 잃은, 인생 구비마다 불행했던 그가 남긴 음악이 회복과 재기의 키워드로 등장하는 것은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본디 낮은 곳에 있어야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당연한 결과일까.

  생이 끝날 때까지도 답을 명쾌히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마빈 게이의 4월1일과 4월2일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흔히들 '생일 전날 죽다니, 비극이다'라고 말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가 죽은 하루의 다음에는 꼭 그가 태어난 날이 다가오는 것임을.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가 남긴 노래 소리에 고개를 까딱일 시간이다. "You don't have to worry, cause baby there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 to keep me from getting to you."(걱정할 필요 없어, 아무리 높은 산도 너에게 향하는 나를 막지는 못할 테니.)

https://youtu.be/GoJn3-FyA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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