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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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핸슨씨의 실패한 독서

moony1217 2021. 5. 4. 01:35

   지금이야 다들 결말을 알게 됐지만 개봉 당시인 2009년만 해도 <500일의 썸머>에서 주인공 둘이 끝내 헤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었다. '488'이란 글자가 연필로 쓰이듯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등장하면서 시작하는 영화의 첫 시퀀스는 어느 공원 벤치에 앉은 두 남녀의 모습으로 이뤄진다. 미국 LA의 스카이라인이 비치는 이곳에서 토마스 한센(조셉 고든 래빗)의 오른손 위로 썸머 핀(주이 디샤넬)이 왼손을 포갠다. 그녀의 왼손 약지엔 빛나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물론 해피엔딩의 예감은 잠시뿐이다. 오프닝에서 톰과 썸머로 짐작되는 소년과 소녀가 홈비디오 스타일의 영상으로 등장하고 나면, 영화는 멀쩡한 접시를 깨는 톰의 모습을 비춘다.

  "어떻게 된 건지 처음부터 말해봐." 동생 레이첼의 물음에 톰이 응답하면서 영화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썸머와 톰은 사랑을 했고, 헤어졌다. 이별은 사실이지만 톰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한장면 한장면, 그녀와 나눈 시간을 곱씹다 보면 알게 될까. 488일째에서 시작한 영화는 그렇게 290일, 1일, 3일, 4일, 8일, 154일처럼 비선형적으로 연애의 페이지를 오간다. 설레는 첫 만남, 뜻밖의 첫키스, 이케아에서 부부인 양 소꿉놀이하던 순간의 중간중간 '헤어지자'고 말하는 썸머, 말다툼,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전언이 끼어든다. 이렇게 총 39번 시간 이동하며 꽤 성실히 복기하는데도 톰은 이별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녀를 처음 알던 날 친구가 했던 '썅년(bitch)이래'라는 말이 뇌리를 스칠 뿐.

  하지만 썸머가 썅년인 이유는 <500일의 썸머>가 전적으로 톰의 이야기라서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주인공 토마스 한센(톰)이 연인 썸머 핀과 이별 후 접시를 깨고 있다.

 

 

운명의 역설

  영화는 시작점부터 장난질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처럼 등장하는 내래이션이 관객을 속인다. "뉴저지주에서 자란 톰 한센이라는 소년은 진정한 사람을 찾기 전까진 행복할 수 없다고 믿었다. ... 미시간 주에서 자란 썸머 핀이란 소녀는 그와 달랐다." 언뜻 신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이 시점의 특성은 등장인물의 행동과 생각을 모두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래이션은 이러한 기대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이미 관객은 '소년과 소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한 소녀를 만난 소년의 이야기이다"라는 내래이션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는 건 영화가 한참 진행된 후다.

  둘 사이 다툼은 주로 썸머 때문으로 보인다. 톰은 진지한 관계를 원하는데, 썸머는 가벼운 관계를 지향한다. "우리 부모님처럼 어차피 이혼할 거야." 톰은 썸머를 많이 좋아한다. 그녀의 미소, 머리카락, 무릎, 하트모양의 점, 말하기전 입술을 핥는 버릇, 웃음 소리, 자는 모습까지 마음에 든다. 썸머의 방에 처음 들어선 날, 그녀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아무한테도 한 적 없는 이야기야"라고 말할 때 톰은 '모든 것이 변한 밤'이라 묘사할 정도로 들뜬다. 그런 톰이 썸머를 알게된 지 118일이 되던 날 "우리 뭐하는 거야?"라고 묻는 것은 자연스럽다. 259번째 날 "우린 뭔데!"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반면 톰의 결함은 썸머처럼 선명하지 않다. 데이트 도중 짧은 순간 등장하고 빠르게 지나간다. 영화 초반부터 예시된 둘의 사랑 태도와 비교하면 자잘한 갈등 같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둘이다. 하나, 그는 운명과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에 정작 적극적이지 않다. 처음 함께 자리한 가라오케 장면부터 그렇다. 술에 취한 친구가 썸머에게 "얘(톰)가 너 좋아한대" 말할 때 그는 말을 아낀다. "정말 나 좋아해?" 썸머가 묻지만 "친구로서"라고 답한다. 둘의 관계를 주도하는 역할은 썸머가 맡는다. 술자리에서 묘한 대화가 오간 뒤 회사 복사실에서 톰을 만난 그녀는 "잘 쉬었어?"라는 톰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키스한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가 다툼으로 번질때쯤 먼저 화해를 요청하는 것도 썸머다.

  둘,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톰은 썸머에게 무관심하다. 함께 레코드샵을 구경하던 날, 썸머는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 노래로 'Octopus's Garden'을 꼽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링고 스타'다. 톰은 왜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링고스타는 인기가 없잖아"라며 비웃을 뿐이다. 함께 찾은 바(bar)에서도 톰은 "발목에 나비문신을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썸머에게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안돼"밖에 없다. 이별 후에도 그의 무신경함은 빛이 난다. 썸머의 파티에 초대받은 톰은 알랭 드 보통의 저서 <행복의 건축>을 선물한다. 톰은 이 책을 과거 동료의 결혼식장에 가는 기차에서 읽다가 썸머를 우연히 만났다. 썸머가 당시 "무슨 책이야?"라고 묻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그 책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톰 자신의 선호다.

  썸머는 달랐다. 카드 문구 제작 회사에서 직원과 비서로 처음 만난 톰에게 그녀는 "원래부터 카드를 만들고 싶었어?"라고 물었다. 톰이 건축가를 꿈꿨다고 말하자, "왜 그 일을 하지 않냐"고 질문한다. 사귀는 동안 거리를 산책하며 톰에게 '현대미술관'을 디자인한 건축가 워커와 아이젠의 이야기를 듣는다. 함께 간 공원에서 톰이 꿈꾸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그려보라며 자신의 팔뚝을 내준다. 영화 내내 톰은 '운명'을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건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부정하는 썸머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 등장한 알랭 드 보통의 저서 <행복의 건축>. 톰은 헤어진 연인 썸머가 개최한 파티에 가면서 <행복의 건축>을 선물로 가져갔다.

 

 

행복하지 않은 행복의 건축

  영화가 끝나갈 무렵 관객들은 안다. 영화 초반의 벤치씬에서 둘은 이미 헤어진 후다. 썸머가 낀 반지는 톰이 아닌 사람과 미래를 약속한 증표다. 톰의 표정은 씁쓸하다. "네 말이 맞았어. 운명, 영혼의 반려자, 진정한 사랑... 그런 건 동화 속에나 있는 얘기더라." 썸머는 웃으며 말한다. "나와 남편은 만날 운명이었어. 그때 네 말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운명과 사랑에 관한 둘의 관념이 뒤바뀐 상황, 썸머는 덧붙인다. "내가 식당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내게 와서 책에 대해 물어봤어. 그가 지금 내 남편이야."

  처음부터 톰이 썸머에게 무심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애 초 둘은 사이가 무척 좋아보인다. 톰과 썸머가 처음으로 소통하는 엘리베이터 씬은 둘의 공통점을 드러낸다. 출근길 헤드셋을 끼고 스미스(The Smith)의 노래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을 듣는 톰에게 썸머는 "저도 스미스 좋아해요"라고 말을 건넨다. 헤드셋 너머 흘러나오는 스미스 노래를 흥얼거리는 썸머의 얼굴을 톰이 바라볼 때 벌써 넋이 나간 표정이다. '나처럼 스미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운명이 틀림없어.' '사랑은 없다'며 진지해지지 말자는 일견 무리해보이는 썸머의 가치관마저 톰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공통된 관심사와 인정만으로 충분한 시기가 지난 것이다. 장기간 연애해본 이들이라면 안다. 관계란 각자가 쳐둔 자아의 테두리를 조금씩 허물고 교집합이 생겨나가는 과정이고,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을 파악하려면 관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군가 남긴 영화평처럼, 이들의 연애는 스미스에서 시작해 링고스타로 끝났다.

  톰이 선물한 책이 하필 <행복의건축>이란 사실은 얄궂다. 책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은 남녀의 사랑과 연애를 분석한 소설과 에세이로 유명세를 탄 작가다.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그가 스물세살에 쓴 출세작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였고, 이후 <우리는 사랑일까>, <키스 앤 텔> 등 소설을 연이어 내놨다. 이 3부작으로 그가 얻은 별명은 '닥터 러브'다. 관심사가 워낙 많은 작가라 <불안>, <일의 기쁨과 슬픔>, <여행의 기술>, <철학의 위안> 등 저서도 쓰긴 했지만, 보통의 뒤엔 늘 사랑 얘기가 있었다. 그 많은 작품 가운데 하필 <행복의 건축>이라니.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내 아내의 모든 것>, <시라노 연애조작단>, <러브픽션> 등 한국영화 3편의 동년배 감독들이 젊은 시절 한번쯤 알랭 드 보통의 팬이었을 거라고 가정했다. 젊은 시절 사랑에 실패한 그 나이대 남성들이 보통의 글을 보며 자기 경험을 되돌아봤을 거란 추측이다. 세 영화 모두 책장이나 주인공의 손에 보통의 책이 놓였다는 공통점이 이런 추정의 근거가 됐다. 책은 비록 <행복의 건축>을 가져왔지만, <500일의 썸머> 감독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첫 챕터 제목은 '낭만적 운명론'이다. 그리고 이 책의 핵심이 되는 챕터는 이런 문장을 담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톰이 연인 썸머와 헤어진 뒤 면접을 보게 된 건축 사무소에서 어텀(Autumn)이란 이름의 여자를 만나 "커피 한 잔 할래요?"라고 묻고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사랑

  영화는 톰이 '어텀'을 만나는 501일을 비추며 끝난다. 썸머와 헤어진 뒤 건축 공부를 다시 시작한 톰은 건축 사무소 면접장에서 만난 어텀에게 끌린다. 그리고 면접장에 들어서려던 찰나, 그녀에게 커피라도 한 잔 하자며 말을 건넨다. 운명을 기다리던 과거의 톰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감독은 이러한 톰의 변화를, 마치 소설 속 전지적 작가시점처럼 톰의 행동과 생각을 묘사하던 내래이션(이러한 신의 시점을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도 한다)을 톰이 중간에 끊어먹으며 자신의 말을 시작하는 것으로 드러낸다. 그러고 보면 전지적 시점이라도 작가가 톰이라면 책은 톰의 시점에서 쓰일 뿐이다. 책이 다른 인물의 목소리도 동등하게 담으려면 그가 등장인물 하나의 자리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 결말은 불안하다.복한 것은 자신이 가진 두 가지 결함 중 하나일 뿐, 관심의 결여는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특별한 노력이다면의 연애 계절이 겨울(윈터)로 접어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작가의 자리에서 등장인물로 내려선 톰이 얻은 건 겨우 다른 등장인물을 들여다 볼 기회 정도다. 서로 무심한 두 등장인물이 상호 이해에 실패하는 이야기가 세상엔 너무 많다. 자칫하면 또다시 톰은 어텀을 알지 못한 채 새로운 복기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500일의 썸머>란 제목과 달리 정작 썸머에 대한 정보는 별로 나오지 않았던 영화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면, 톰은 이제 '어텀'을 펼쳐보게 될까. <행복의 건축>으로 엇나가다가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으로 완성되는 것이 사랑이다. 톰이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작품이라도 서점에서 꺼내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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