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갑질에는 노조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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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에는 노조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moony1217 2019. 4. 9. 02:18

 

  회사가 끝나면 나는 카페에 간다. 책을 읽기 위함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고는 못해도, 습관 때문인지 매일 어느 정도 분량을 눈에 담지 못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백수일 때보다 시간은 없고, 짧은 시간에 많이 읽어야 하니 매일매일이 갈급하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많아 시간이 빌 때마다 서점에 간다.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양껏 사 들고 집에 온다. 다 읽지 못하는 책이 태반이요, 읽는 글들도 채 소화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다. 탐식과 소화불량이 반복되는 요즘이다.

  이번 주말은 대전에서 보냈다. 자식들이 떠난 후 부모의 집은 한산하다. 사람이 줄었건만 부모가 활용하는 공간의 크기는 별다르지 않다. 떠난 자리에 사람이 들지 않으니 내 방은 창고나 다름없다. 인디아나 존스라도 된 심정으로 방문을 여니, 구석에 오래전 읽은 책들이 쌓여 있다. 제대 이후 읽은 책들은 대개 서울에 있으니, 방에 쌓인 꾸러미들은 입대 전까지 읽었던 책의 목록일 것이다. 익숙한 음식이야 소화 시키기 쉬울 듯하여 반가운 마음에 책뭉치를 뒤적였다.

 

서울 자취방 내 정돈된 책장의 모습. 여기 모인 책을 열두 번 정도 더하면 서울집에 있는 책 전체 수량과 얼추 비슷해질 것 같다. 대전집의 책장은 또 별개다. 다 봤다면 나는 아마도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터인데... 직접촬영.

 

  개중에 진중권의 글이 있었다.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이렇게 명료한 글이었나. 학술적 엄밀성은 떨어지나, 시론격의 텍스트로는 깊이가 넘친다. 죽은 독일 사람과 숨진 프랑스 사람의 글을 즐겨 읽을 때는 몰랐다. 진중권의 글이 좀 쉽고 단순하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니었다. 그때의 내가 짐짓 복잡한 척하는 현학적인 사람이었을 뿐. 거리를 두고 보니 논의 자체도 훌륭하다. 무엇보다 굉장히 '현재적'이다. 예컨대 이런 글.

 

  누구나 말한다. 폭력 대신에 대화를, 투쟁 대신에 타협을 하라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대화란 투명한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성적 대화 뒤엔 늘 끈적끈적한 물질적 이해와 뭉클뭉클한 이 숨어있다. ‘없는 대화는 공허하다. 소렐은 옳다. 하지만 대화없는 은 맹목이다. 그래서 소렐은 틀렸다. ‘의 맹목적 찬미. 이게 좌우익 파시즘이다. 그래서 난 벌거벗은 의 원시적 충돌을 이성적 대화로 바꾸는 기제로써 의회주의를 옹호한다. 하지만 대화를 위해 을 거세하는 데엔 반대한다. ? 거세당한 자는 대화상대로 인정받지 못하니까. ‘없는 자와 진지하게 대화 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노조는 있어야 한다. 국가라는 독점적 권력을 견제하는 으로 남아야 한다. ?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

  총파업이 시도 때도 없이 현실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장경제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잠재적으로는 늘 존재해야 한다. 총파업은 메시아다. 국가라는 리바이어던과 마주선 잠재적 메시아. 단 우리는 이 메시아를 탈신학화해야 하고, 의 행사가 맹목으로 흐르지 않게 늘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 ‘이성의 포장지로 을 감추는 근대 자유주의의 위선, ‘의 망치로 이성을 두들겨대는 좌우익 탈근대의 악마성. 근대와 탈근대의 소모적 대립을 넘어서려는 나의 유물론은 그래서 힘의 비판, 폭력비판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 두 개의 권력,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저, 푸른숲, 2002

 

  노동 문제뿐이겠는가. 이 문단을 읽으며 나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갑질을 생각했다. 대부분의 갑질은 마주한 당사자 간 힘의 크기가 다른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힘은 명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먹깨나 쓴다는 사람도 현실에서 눈앞의 사람을 함부로 두들겨 패지 못한다. 즉각적으로 덮쳐올 경찰력과 법적 처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갑질은 그래도 별문제 없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온다.

 

2002년에 나온 진중권의 책 <폭력과 상스러움>. 당대 유행한 담론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솜씨나 언어유희하는 능력 모두 보통이 아니다. 출처 : 알라딘

 

  한진 그룹 일가를 예로 들어보자. 이른바 땅콩회항이 벌어진 2014,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여론의 입길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인 고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고 조 전 부사장은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3월엔 물컵 폭행으로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4월에는 조 전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운전기사와 가정부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다. 그 과정에서 한진 그룹은 검찰 조사를 받았고,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까지 시작됐다. 갑질의 주체를 겨냥한 처벌적 처분이었다.

  하지만 갑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갑질은 사회의 온갖 방면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재벌 가문이야 그렇다고 치자. 갑질하는 일반 시민을 처벌할 수 있나. 직장 갑질이 있는가 하면 대학원 갑질도 있다. 소비자라는 이유로 백화점의 판매원과 주차요원을 괴롭히는 사람들, 서비스 센터 직원을 벌점으로 압박하는 이들도 있다. 다양한 갑질의 유형 사이에 공통점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앞의 둘은 장소는 다를지언정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행사하는 권력이라는 점에서 공통되다. 하지만 뒤의 사례는 어떤가? 이들 사이에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힘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갑질의 공약수는 따로 있다. 당사자 간 관계가 계약을 매개로 성립된다는 점이다. 진중권이 언급한 노사 관계는 계약이 작동하는 대표 사례다. 고용에 앞서 노동자는 사측이 내미는 계약서에 서명한다. 서명하지 않을 때도 물론 있지만, 여기에도 묵시적 계약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회사와 회사 간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원청과 하청은 거래를 시작하기 전에 계약 절차부터 밟는다. 계약이 없으면 양자의 관계는 시작되지 않는다. 백화점 점원과 손님은? 점원이 손님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손님 개인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자칫 손님과 싸웠다가는 회사로부터 징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약을 없앨 수 있나. 계약 자체는 거래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가치중립적일 뿐, 어떠한 부정적 함의도 거기엔 내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근대 초 계약은 일종의 혁신이기도 했다. 전근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지극히 불평등했다. 신분에 따라 사람이 사람의 인신을 예속할 수 있었다. 근대적 관계는 달랐다. 계약 당사자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서로를 만났다.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사자는 계약을 파기할 수 있었다. 요즘에야 부정적 함의를 갖지만, ‘갑질에 원용되는 이란 말도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갑과 을은 평등한 관계에서 임의적으로 법률계약을 맺는 양 당사자를 의미할 뿐이었다.

 

점원의 행동을 제약하는 건 눈앞의 손님이 아니다. 직장인 백화점과 맺은 계약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회사와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은 손님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된다. 위 짤방은 그 생생한 사례다. 출처 : 에펨코리아 https://www.fmkorea.com/1535459000

 

  문제는 그 자유가 불완전하다는 데서 온다. 계약의 실상은 절대적으로 강자에게 유리하다. 계약을 맺는 당사자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 하나 잘라도 회사에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잘린 사람은 생계가 위태롭다. 정규직, 아르바이트생, 하청업체 사장 모두 마찬가지다. 계약을 파기하고도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약자는 어쩔 수 없이 강자의 압제를 견뎌야 한다. 한쪽의 생사여탈과 직결되는 한, 계약은 을의 희생을 영속화하는 허울에 불과하다.

  재벌이 노동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어쩌면 막기 쉽다. 힘이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큰 회사가 작은 회사에게 가하는 압력도 마찬가지다. 가시적 폭력은 폭력의 주체를 처벌하기만 해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폭력은 다르다. 거기에 절대적인 힘을 가진 개인이나 조직은 없다. 힘은 분명 존재하지만, 계약이란 껍질에 둘러싸여 바깥에선 보이지 않는다. 폭력을 선택지로 만드는 계약자유의 이면, 비가시적인 폭력의 조건이다.

  진중권의 문장을 다시 들여다본다. “대화란 투명한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성적 대화 뒤엔 늘 끈적끈적한 물질적 이해와 뭉클뭉클한 이 숨어있다.” 계약 당사자 간의 대화는 물론 중요하다. 상충하는 서로의 이해를 두고 관계자들이 매양 싸우기만 한다면 시장의 질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대화만 중시하고 힘을 도외시하다 보면 오히려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데 굳이 대화라는 귀찮은 절차를 감내할 사람은 많지 않다. 갑을 처벌하는 것 못지않게, 을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그리고 노동조합이 그 정체다. 사람이 사람에게, 회사가 회사에게, 기업이 노동자에게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이들 제도는 여러 가지 방책을 마련한다. 갑질이 벌어진 이후 처벌도 물론 하지만, 애당초 갑질을 상상할 수 없도록 갑과 을 사이 힘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이들은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균형의 보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보이는 정부의 개입이나, 노동조합의 투쟁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땅콩회항사건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은 박창진 사무장을 응원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노동조합 활동가로서 그를 응원하는 이는 많지 않다. 노조의 움직임을 집단행동이라며 욕하는 이들은 알면서 부러 그러는 걸까,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걸까. 아이가 그러하듯, 갑질도 마을이 키운다. 부당한 폭력이 사라지길 원한다면 노조에 대한 관념부터 바꿔야 한다.

 

p.s. 어제(8일)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의 부고를 들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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