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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약 한 권의 책이라면 - 영화 <화씨 451>과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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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약 한 권의 책이라면 - 영화 <화씨 451>과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

moony1217 2021. 4. 26. 03:03

  한 남자가 벽걸이 TV 앞에 앉았다. 흰 나이트가운을 입은 그는 오른손에 책 한권을 펼치고 있다. 밤중인 듯 어둑한 거실, TV 불빛이 그의 왼쪽 옆얼굴과 책을 비춘다. 남자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펴고 글자를 짚어가며 책을 소리내 읽는다. "챕터 1. 내가 태어나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 삶에서 주인공이 누구인지, 나 자신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내 삶의 이야기를 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금요일 자정에 태어났다."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쓴 자전적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이하 '코퍼필드')의 첫 문장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화씨 451>(1966)의 한 장면. 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한밤 중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꺼내 읽는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화씨 451>(1966)에서 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방화수(fireman)'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졌다. 현실 속 영어 단어 fireman이 불을 끄는 소방관을 뜻한다면, 영화는 불을 지르는 사람을 지칭하도록 단어를 뒤집었다. 방화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을 피우는 방화범과는 다르다. 복수나 분노처럼 사적인 감정이나 의도를 갖고 불씨를 지피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정부 당국의 공인을 받아 오직 한정된 장소에서, 특정한 사물에만 화염을 방사한다. 그 대상은 바로 '책'이다.

  정부가 책의 소유와 향유를 모두 금지한 세계, 몬태그는 꽤 유능한 방화수였다. 직장에서 인정받아 곧 승진할 거란 말을 들었고 교외에 주택을 마련했으며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았다. 겉보기엔 불만가질 이유가 없는 생활, 몬태그가 처음 당황한 표정을 짓는 건 퇴근길 전철에서 옆집 여자 클라리세와 만나면서다. 클라리세는 몬태그에게 묻는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책은 왜 금지됐을까요?" "불태운 책들 중 한 권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나요?" "행복하세요?" 집으로 돌아간 몬태그는 아내 린다와 TV를 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잠든다. 그리고 다음날, 몬태그는 린다가 쓰러진 모습을 발견한다. 각성제, 흥분제 등 약물도 일상적으로 복용한 탓이다.

  남편이 집에 있거나 없거나 린다는 매일 TV 속 등장인물의 자극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외모를 가꾸고 가구 등 소품을 구매하는 데 힘을 쏟는다. 걸핏하면 흥분제를 입에 넣는다. 린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세계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산다. 깨어난 린다는 전보다 더 TV에 집착하고, 몬태그와의 성관계에 몰두한다. 몬태그는 그런 아내의 모습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행복하냐는 클라리세의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잠든 린다를 침대에 둔 채 몸을 일으켠 그는 거실로 나와 책을 한 권 꺼내든다. 이때 그가 손에 쥔 책이 '코퍼필드'이다.

SF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왼쪽)와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미국의 SF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동명의 소설이 이 영화의 원작이다. 하지만 소설 <화씨 451>에는 몬태그가 아내 몰래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몬태그의 심경 변화를 눈치챈 방화서장 비티가 집에 찾아와 자수하라는 취지의 경고성을 날린 뒤, 아내가 집안을 뒤져 여러권 책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몬태그가 아내 앞에서 보란듯이 책을 읽긴 하지만 '코퍼필드'가 아니다. 소설 속 몬태그는 <걸리버 여행기>를 읽는다.

  트뤼포는 왜 원작에 없는 '코퍼필드'를 영화에 담았을까.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영화 부문 큐레이터 찰스 실버는 그 까닭을 트뤼포의 '작가주의'에서 찾는다. 트뤼포는 자전적인 영화를 여러 편 찍으면서 자신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인물들에게 집어넣었는데, 이는 디킨스가 '코퍼필드'에서 한 작업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디킨스는 유년시절 빈곤, 부모의 상실 등 이유로 고통받는 주인공을 주로 그린 작가다.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등 대표작 대부분이 힘든 유년에 대한 묘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코퍼필드'는 디킨스가 가장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디킨스 소설 속 인물들처럼 트뤼포도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전기에 따르면 트뤼포는 1932년 태어났는데, 어머니 자닌 드 몽페랑은 트뤼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얼마 뒤 롤랑 트뤼포란 남자와 결혼했지만 어린 트뤼포는 부모의 무관심 속에 외할머니의 손으로 길러졌다. 그러다 열 살 무렵 할머니가 사망하면서 트뤼포는 부모가 사는 클리낭쿠르가의 아파트에 보내졌는데, 이른바 '홍등가'에 입지해 유혹과 폭력, 범법이 난무한 지역이었다. 영화비평가 앙투안 드 베크의 평전 <트뤼포, 영원한 시네필의 초상> 등 전기를 보면 이 시기 트뤼포는 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와 디킨스의 소설을 숙독했다고 한다.

트뤼포는 영화 <400번의 구타>(1959)에서 소년 '앙트완'의 유년기를 그려냈다. 소년원에 수감됐던 앙트완은 영화 말미 창살을 벗어나 바다로 향한다.

  트뤼포도 디킨스처럼 자신의 작품에서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다룬다. 초기작 <400번의 구타>(1959)에서 그는 몸소 겪은 일화를 거의 그대로 재현한다. 1944년,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생쯤 되는 나이에 트뤼포는 학교를 빠져가며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다 어느 날 선생님에게 결석 사실을 들킨다. 선생님이 학교 결석 사유를 묻자 트뤼포는 "어머니가 죽었다"고 말하는데, 하필 그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바람에 거짓말을 들키고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 앙트완도 트뤼포와 똑같은 거짓말을 한다. 앙트완 역시 트뤼포처럼 계부와 친모 사이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인물이다.

  작품에 자전적 요소를 담는 트뤼포의 제작 방식이 디킨스 독서의 결과인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삶에서 길어낸 문제의식 때문에 자연히 디킨스와 가까워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영화감독이 작품에 특정 장면을 집어넣었을 때 어떤 의도가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촬영이 주인 프로덕션 기간만 평균 3개월, 편집, CG 등 후반작업도 수개월씩 걸리는 제작물이 영화다.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단계까지 포함하면 몇년씩 걸리기도 한다. 그런 작품을 만들다 보면 현장에서 촬영한 장면이라도 편집에서 덜어내는 일은 예사다. 원작이 있는 작품에서 원작과 어긋나는 장면이 삽입됐다면 연출가만의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

  <화씨 451>에서 '코퍼필드'의 등장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하필 등장 시점도 몬태그가 기존 자기 삶을 돌아보는 상황이다. '코퍼필드'를 읽은 뒤 몬태그는 사람이 바뀐다. 책에 불을 지르러 나갔다가도 한권씩 챙겨오는 기행을 벌인다. 책을 다수 보유한 심리학자가 자신의 책들과 함께 불타 죽겠다며 부르짖는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한다. 더이상 책에 방화할 수 없다고 느낀 몬태그는 서장에게 사직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서장은 마지막 명령이라며 몬태그가 자신의 책에 불을 지르도록 만든다. 분노한 몬태그는 서장의 몸에 불을 붙이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달아나던 몬태그가 '책사람(book people)'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서며 영화는 마지막 장에 이른다.

영화 <화씨 451>(1966)에서 한 소년이 로버트 스티븐슨의 저작 <허미스톤의 둑>을 외우고 있다. 할아버지는 소년이 책을 완전히 암기할 때를 기다린다.

  마을 사람들은 책을 소유하지 않는다. 책-물질이 있다면 당국과 방화수가 언제든 간섭해올 수 있다. 그들은 책을 읽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책을 통째로 외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책의 이름으로 소개한다. "저 사람은 플라톤의 <국가>, 저 이는 에밀리 블론테의 <폭풍의 언덕>. 저쪽은 바이런의 <해적>, 그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멀리 실개천 너머, 키작은 소년과 할아버지가 오두막집에 앉아 무언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 초중반 이후 사라졌던 클라리세가 나타나 그들의 대화를 설명해준다. "로버트 스티븐슨(<보물섬>의 저자)의 저작 <허미스톤의 둑>을 외고 있어요." 계절이 바뀌고, 화면 안에선 눈이 펑펑 내린다. 소년은 작품의 마지막 문장을 암송한다. 할아버지는 눈을 감았지만, 그는 책으로 손자에게 이어진 것이다. 몬태그는 자신도 한 권의 책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영화와 달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책을 불태우거나 독서가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됐고, 이명박 정부가 정리했던 '불온서적' 목록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다. 반대로, 책 한권을 통째로 외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삶을 통째로 쏟아붓기에 책은 너무나 흔한 존재다. 흔한 것은 역설적으로 없어도 그만인 무엇으로 여겨진다. 4월23일 '책의 날'을 별도로 기념하는 이유다.

  이런 세상에서 굳이 '책이 사라진다면'이란 극단적 상상을 밀어붙인 자체가 내게는 사랑으로 느껴진다. 눈앞의 상대를 보면서도 '그/그녀가 없다면' 상상해본 경험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사랑이다. 책을 불태우는 세상이 끔찍하다는 것은 반대로 책을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런 주장을 담아 영화를 찍으면서, 결정적 장면에 자신이 즐겨읽은 책의 표지와 첫페이지를 비추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프랑스 평단에선 '트뤼포치곤 졸작'이라고 비판받았다지만, 정작 트뤼포는 이 영화를 즐거워하며 만들었을 것만 같다.

  책사람이 몬태그에게 그랬듯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오직 한 권의 책만 고를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책으로 남고 싶은가.

 

*p.s.1. 촬영 시점이 밀린 탓에 트뤼포는 이 영화를 6년 가까이 찍었는데, 기다리는 동안 평소 흠모하던 미국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과 1대1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트뤼포는 연출 역량이 급성장했다고 평가받는데, 정작 만드는 영화는 매번 악평을 받았다. 연출의 기술적 차원을 따라하려다 작가로서의 방향감각을 잃었던 탓일까. 그가 다시 호평을 받기 시작한 건, <400번의 구타> 주인공인 '앙투안'이 등장하는 연작을 내놓으면서다. 유년기의 불행과 부자유, 사회적 편견과 속박, 해방의 탐색이란 근원적 문제의식으로 돌아간 것이다. 작가주의를 그렇게 주장하더니, 언행일치 무엇.

*p.s.2. <화씨 451>에서 몬태그는 자신이 외울 책으로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을 고른다. 자신을 변화시킨(혹은 자신을 만든) 책과 자신이 되고 싶은 책의 불일치를 주제로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1: 영화감독의 철학이나 스타일이 영화적 표현에 드러나야 한다는 입장. 특정 감독의 영화를 분석할 때 한편 한편을 개별적으로 살펴볼 것이 아니라 여러 작품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비평적 흐름으로 이어졌다. 트뤼포는 프랑스의 유명 영화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에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을 기고하면서 당시 영화들이 시나리오와 대사에만 집중하느라 감독의 개성은 찾기 어렵다고 비판한 바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dbJBevuuQY&t=2351s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화씨 451>(1966)의 한 장면. 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한밤 중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꺼내 읽는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화씨 451>(1966)의 한 장면. 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한밤 중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꺼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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