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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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영화 (Movie of Heardability)

moony1217 2021. 6. 1. 23:46

  영화 <헬프>(2011)는 듣기에 대한 영화다. 논픽션 소설 '헬프'를 쓰는 사람은 주인공 유지니아 스키터(엠마 스톤)이지만 책의 내용은 흑인 가정부들의 진술로 채워진다. 유지니아가 아무리 글을 잘쓴다고 해도 가정부들의 이야기 없이는 한 줄도 나아갈 수 없다. 영화 내내 유지니아는 "인터뷰를 꼭 하고 싶어요" "열두명이 더 필요해요" 가정부들에게 사정을 하고 다닌다. 정작 그녀가 글을 써내려가는 장면은 너무 짧아서 눈에 띄지 않는다.

  유지니아의 듣기는 공간을 오가면서 이뤄진다. 그녀는 자주 부엌에 찾아가고 때론 흑인의 집에 들어선다. 영화에서 부엌 등 공간은 "평등하되 분리한다"는 인종차별의 현실을 드러내는 기제다. 영화의 배경인 1963년 미시시피 잭슨에서 백인은 '자기만의 방'에서 몸을 치장하거나 거실에서 손님을 맞는 반면 흑인은 부엌일을 하거나 아이를 돌본다. 가정부들은 백인의 집에서 늘 메이드복을 착용하며, 평상복은 자신의 집에 있을 때만 입는다. 미니 잭슨(옥타비아 스펜서)이 힐리 홀브룩 집안의 가정부를 때려치우는 이유도 화장실이란 공간 때문이다. 사람이 여럿 죽을만큼 비바람이 거센 날에도 힐리는 미니에게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쓸 수 없다며 집 바깥에 마련해둔 흑인 전용 화장실을 가리킨다. 유지니아를 제외하면 부엌을 오가는 백인은 셀리아 레이 푸트(제시카 차스테인) 둘 뿐이다.

 

공간으로 드러낸 차별의 현실

  유지니아가 부엌을 찾는 이유는 결핍에 있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유지니아는 가정부 콘스탄틴이 해고됐다는 소식을 듣지만 원인을 알지 못한다. 콘스탄틴은 그녀에게 어릴 적 자신을 양육한 보모 이상의 존재다. 그녀의 회상 속에서 콘스탄틴은 "애들이 나 못생겼대요"라며 좌절할 때 "너는 특별한 아이"라며 앞날을 비춰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친구 엘리자베스의 홈파티에서 유지니아가 가정부 에이블린의 얼굴이 구겨지는 모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콘스탄틴의 그림자 때문이다. 친구 힐리가 "유색인종과 화장실을 함께 쓰면 병이 옮는대. 나는 우리 아이들 지킬거야"라고 편견에 찬 말을 내뱉은 직후, 유지니아는 부엌의 에이블린에게 다가가 "기분 나빴을 것"이라며 민망해 한다(이 다음 쇼트는 콘스탄틴과 자신이 과거 나눴던 대화 장면이다).

  셀리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상류층 남성 조니 푸트와 사귀던 중 임신을 이유로 결혼한 그녀는 유지니아를 포함한 동네 여성들의 모임에 끼지 못한다. 조니의 전 여자친구인 힐리가 그녀와의 만남을 극히 꺼려서인데, 영화의 말미까지 그녀는 영문을 모른다. 유산이 거듭되면서 조니와의 관계도 불안하다. 정작 조니는 신경쓰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임신을 계기로 결혼한 만큼 언제든 자신이 버림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니가 없는 동안 수십개 방이 딸린 큰 집에는 늘 그녀 혼자뿐이고, 좋은 환경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부엌을 드나드는 일은 하류층 출신인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힐리에게 해고된 미니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면서 부엌을 유독 기쁜 표정으로 찾는다.

  정작 흑인 가정부들은 둘의 방문을 꺼린다. 엘리자베스네 가정부 에이블린(비올라 데이비스)은 신문의 '살림 정보란'을 맡게 된 유지니아가 부엌일을 질문할 때는 웃으며 응대하다가 흑인 가정부의 삶을 들려달라고 하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피한다. "제 사촌은 투표소에 갔다고 누가 차에 불을 질렀어요." 미니는 셀리나가 자신과 함께 부엌 식탁에서 밥을 먹으려 하자 그녀의 접시를 옮기려 든다. "아씨는 식당에서 드세요." 가정부의 생활에서 차별은 익숙하다 못해 없으면 어색한 무엇이다. 때로 그것이 폭력의 형태를 띄어도 저항은 일어나지 않는다. 

  흑인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라는 걸 감독은 카메라로 드러낸다. 클로즈업과 바스트숏이 다수인 이 영화에서 롱쇼트가 나오는 장면은 차별의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 주로 할애된다. KKK단의 총격 소식을 듣고 에이블린이 달아날 때 카메라는 불현듯 멀고 높아서 다른 흑인 가정부의 차림과 구분하기 어렵다. 카메라가 가까이서 잡을 때에는 에이블린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들어온다. 해고 이후 남편에게 두들겨 맞던 미니가 멀쩡히 학교 다니던 딸을 가정부로 출근시킬 때도 구도가 유사하다. "말대꾸하지 마라" 등 행동지침을 전수하며 미니가 딸과 흑인 거주지역을 걸을 때 카메라는 멀고 미니와 딸 주변으로 가정부 차림을 한 흑인 여성 십수명이 끼어든다. 차별의 현실은 책을 통해서도 환기된다. 영화에서 책 제목이 정확하게 보이는 쇼트는 오로지 두 번 등장하는데, 하나는 유지니아가 쓰는 '헬프'고 다른 하나는 '앵무새 죽이기'다.

 

해방적 힘을 가진 글쓰기

  영화의 결말은 미묘하다. 작품 '헬프'가 일약 대박을 치면서 유지니아는 뉴욕의 하퍼 앤 로 출판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다. 구술에 참여한 흑인 여성들은 꽤 많은 돈을 손에 쥔다. 악역 힐리는 미니의 똥으로 만든 파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소설을 통해 알려져 망신을 당한다. 에이블린도 그녀에게 한방 독설을 날린다. "당신은 구제불능이야. 지겹지도 않아?"

  하지만 인종차별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힐리를 향해 쓴 말을 내뱉을 때 에이블린은 엘리자베스에게 해고된다. 에이블린의 증언 때문에 자신이 망신당했다고 짐작한 힐리가 그녀에게 도둑 누명을 씌우는 탓이다. 미니가 셀리아에게 음식 대접을 받고 평생 가정부로 고용되는 해피엔딩도 물론 나오지만 예외적이다. 힐리는 백인 상류층이고, 흑인 여성은 가정부 외엔 할 일이 마땅히 없다. 심지어 힐리가 미니의 똥으로 만든 파이를 자신이 먹었다는 사실이나 에이블린의 독설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호하다. 그녀가 무너지는 장면에는 언제나 백인 관객이 있다. 여전히 흑인은 그녀가 눈치를 봐야할 만큼 유의미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불안한 결말에도 영화의 톤은 비관적이지 않다. 차별은 그대로이나,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공간을 중시하던 감독은 주인공들의 변화도 장소의 이동으로 보여준다. 힐리의 집 앞에 파이를 들고 찾아갔다가 외면당했던("나를 세탁기 판매원처럼 세워뒀어요") 셀리아는 더이상 동네 백인 여성들을 찾지 않는다. 그녀는 임신, 유산과 관계없이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니와 함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집에서 결혼 압박에 시달리던 유지니아는 글쟁이로 성공해 뉴욕으로 간다. 남편에게 맞으며 살던 미니는 집에서 딸을 데리고 나와 살게 됐고, 에이블린은 딸처럼 양육하던(그녀가 모블리에게 하는 "You is Kind..."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모블리를 두고 엘리자베스의 집을 떠난다.

  셀리아가 '유색인 아동 자선 무도회'에서 연필을 잡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진행상 필요가 없는 장면(그녀가 그곳에서 왜 글을 쓰는지, 글이 어떤 내용인지 이후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인데, 연필을 잡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면 독특한 공통점이 나타난다. 백인은 치장, 흑인은 집안일처럼 자신의 본래 역할을 제외하고 무언가를 집어드는 사람은 유지니아와 에이블린, 그리고 셀리아 셋뿐이다. 영화에서 무언가를 '쓰는' 사람은 그들밖에 없다. 내게 이 장면은 연필을 쥔 자만이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읽힌다(반면 글쓰는 유지니아가 매력적이라던 남자친구 스튜어트는 정작 완성된 그녀의 작품을 본 뒤엔 견디지 못하겠다며 '이기적'이란 말을 내뱉고 떠난다.)  

 

듣지 않으면 쓸 수 없다는 말

  글을 쓰는 사람은 유지니아지만, 글의 재료는 흑인 가정부들에게서 온다. 심지어 유지니아는 영화에서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묘사된 적도 없다(오히려 하퍼 앤 로 출판사에서 한 차례 거절 편지를 받고 뉴욕을 떠나왔다). 에이블린이 말을 시작하는 건 유지니아가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흑인 가정부들은 세 번 유지니아를 찾는데, 미니가 해고됐다는 소식을 듣거나(에이블린), 남편에게 폭행당하고 딸을 가정부로 내몰아야 했거나(미니), 금반지를 훔쳤다는 이유로 힐리네 집 새 가정부가 경찰에 폭행당하며 끌려가거나(10여명의 가정부) 등의 계기 탓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괴로움과 분노는 이들에게 일상적인 일로, 굳이 이번에 입을 열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유지니아의 존재를 이들이 안다는 사실 뿐이다.

  유지니아는 '믿을 만한' 청자로 그려진다. 그녀가 가정부 콘스탄틴과 맺은 가까운 관계는 거울처럼 흑인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게 한다. 게다가 그녀는 흑인처럼 결핍이 있는 사람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남자 안 만나느냐'는 핀잔을 듣고(유지니아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혹시 여자를 좋아하느냐고 돌려 묻기까지 한다), 막상 남자를 만날 때는 외모와 성격을 이유로 치인다. 셀리아의 집에서 미니가 자신의 범행(똥 파이 먹이기!)을 고백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친구 에이블린에게도 비밀로 했던 이야기를 미니가 말할 때 영화는 이미 후반부로, 미니는 셀리아의 유산과 힐리 등 백인 여성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상태다.

  유지니아는 '잘 들으려는' 사람이기도 하다. 유지니아는 인터뷰를 거절당하고도 묵묵히 다시 요청하는 사람이다. 거절하는 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왜 그들의 이야기가 중요한지 조용히 설득한다. 자신의 글쓰기가 가치있다는 사실 못지않게 증언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모습도 보인다("얼마나 두려운지 알아요" "이해해요"). 무엇보다 그녀는 함부로 쓰지 않는다. 12명 인터뷰가 더 필요하다는 편집장의 말에 미니는 "딴 사람들 이름으로 내 얘기 써요. 어차피 이름도 다 가명이잖아요"라고 말하지만, 유지니아는 "그건 옳지 않다"고 답한다. 책 출판이 막힐 상황에서도 한치 흔들림이 없을 때 그녀는 남의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이 갖춰야 할 윤리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을 오갔던 사람들만이 자신을 옭아맨 현실에서 벗어났다는 결말은 동어반복 같다. 하지만 이는 쓰기라는 행위를 거쳐 도달한, 차이를 내재한 반복(들뢰즈)이다. 더이상 가정부들은 백인 여성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나 때문에 곤란해지셨잖아요"라는 유지니아의 말에 에이블린과 미니는 "우린 다 떳떳이 이겨낼 거예요"라고 답한다. "진실을 말했을때 나는 자유를 느꼈다... 우리 집안에서 나온다던 작가는 나인 모양이다"라는 에이블린의 독백처럼, 그들은 이미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말하는 사람이 됐다. 이는 힐리에게는 두렵고 에이블린에겐 반가운 전언이다. 자유를 가져온 것은 쓰기이나, 쓰기는 듣기 없이 불가능하다. <헬프>는 잘 듣는 자의 해방적인 잠재력을 믿는 영화다.


  P.S.1. <헬프>와 <그린북>(2018)을 두고 결국 백인 감독의 영화라는 비판이 있었다. 피해 당사자인 흑인의 목소리는 지워진 채 백인이 구원자로 나선다는 것이다. 에이블린 역의 비올라 데이비스가 2018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역할을 후회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비판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이는 <헬프>의 내레이션이 에이블린의 입에서 흘러나온다는 디테일을 놓친 지적이다. 유지니아가 글을 쓰는 계기와 과정을 그린 영화의 주요 줄거리 역시 에이블린을 포함한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를 그녀가 듣는 행위로 채워져 있다. 유지니아와 에이블린의 만남이 한쪽에는 성공을, 한쪽에는 각성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영화는 유지니아와 에이블린이 서로를 구원하는(Help each other) 이야기에 가깝다. 혹 영화를 예전부터 글을 써왔던 에이블린이 유지니아와 만나 주체로 각성하는 이야기로 본다면, 유지니아는 '사라지는 매개자'이고 그녀가 주인공처럼 보인 플롯은 사실 이야기의 서브플롯에 불과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P.S.2. 유지니아의 엄마인 펠런 부인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주체'가 아닌 형태로 변화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앞서 그녀가 '미국의 딸 연맹' 사람들과의 만찬에서 가정부 콘스탄틴을 해고할 때, 백인 여성들의 눈치를 보다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것으로 그려낸다. 그녀는 후회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결국 딸의 책을 읽은 뒤 반성의 뜻을 밝힌다. 하지만 복막암으로 투병 중인 그녀는 자신의 원래 공간인 집을 떠나거나 새로이 뭔가를 시도하지 않는다. 다만 유지니아를 응원하겠다고 선언한다(유지니아는 "아픈 엄마를 떠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는 "네가 이렇게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며 딸의 미래를 지지한다). 이 응원이 특별한 것은, 책을 쓰는 인물이란 현실에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행동하진 못할지라도, 타인의 올곧은 선택을 지지하는 행위는 현실 속 대부분의 인간이 지향할 수 있는 윤리의 최대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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