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술자리에는 세대가 없다 - <세대 게임>, 전상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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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는 세대가 없다 - <세대 게임>, 전상진

moony1217 2019. 4. 26. 19:43

 

  대학 시절,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은 술자리에 모였다. 하릴없는 청춘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이따금 카페에, 혹은 당구장에 가기도 했다. 노래방에 가는 날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매번 모임의 끝은 술집이었다. 무엇보다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곳에는 늘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 얘기, 연예인 얘기, 그리고 이성 얘기. 나처럼 술 한 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야기의 세계에선 시민권이 있었다. 각자 만 원씩만 내면 배부르게 안주까지 먹을 수 있었다. 만 원의 행복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했다.

  그땐 몰랐다.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는 오후 일과 내내 카페나 게임방에서 시간을 보낸 반면, 누군가는 알바를 마친 후에야 술자리에 왔다. 고민 없이 한턱내는 친구가 있었던 반면 오늘은 돈이 없다며 한 번씩 자리를 피하거나 돈을 빌리는 사람이 있었다. 시험 기간이면 그 차이는 더 두드러졌다. 대다수 친구들은 종일 도서관에 앉아 공부에 열중했다. 하지만 몇몇은 저녁 시간이 지나서야 지친 얼굴로 도서관에 들어왔다. 편의점 알바나 과외를 마치고 온 것이었다. 시험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그 와중에 장학금까지 챙기는 이도 간간이 있었지만, 대체로 시험 준비에 종일 매진한 사람이 좋은 학점을 받았다. 시험을 마친 후에는 다 함께 술자리에 갔지만 같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밟아온 길은 보기보다 달랐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모습. 그는 지난 3월 <한국사회학>에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다. 출처 : 경향신문

  주간경향 1320호는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논문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를 다뤘다. 기사에 요약된 논문의 문제의식은 명료했다. 386세대가 정부와 시장 모두에서 386세대가 지나치게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이교수가 자리 독점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자리 독점이 발생한 이유는 분명하다. 386의 운이 유별나게 좋았다. 윗세대는 민주화 이후 밀려났고, 아랫세대는 IMF로 시장 진출이 늦었다. 386은 그렇게 생겨난 공간을 메웠다. 386세대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성공을 거둔 것은 그들의 능력과는 무관한 인구학적 요인 덕분이었다.

  그 결과는 세대 전쟁이었다. 한번 차지한 자리에서 386은 비켜나지 않았다. 386에겐 행운이었던 자리 독점이 아랫세대에게는 비극이 됐다. 시장에 존재하는 권력과 자원에는 한계가 있다. 누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다른 사람은 자리가 비기를 기다려야 한다. 혹 힘으로 상대를 밀어내기도 하지만 상대보다 덩치가 커야 가능한 일이다. 똘똘 뭉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건 어느 집단이건 마찬가지이지만 응집이 일구는 힘의 크기는 집단마다 다르다. 386이 형성한 사회적 네트워크는 힘이 셌다. 아랫세대의 자리 교체 압력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뿐이었다.

  일견 설득력 있는 분석이지만, 단언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이 교수의 분석이 들어맞으려면 386이 단일한 집단을 형성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저서 <세대게임>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세대 전쟁론은 부양 세대인 노인들이 하나의 행동 단위로서 자신들의 이해를 실현하는 정치 조직을 구현했다고 본다.” 전 교수에 따르면 그 전제는 허구다. 세대라는 범주로 묶이는 개인들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제각기 다르다. 강남에 빌딩을 소유한 노인과 폐지를 줍는 노인의 처지가 어떻게 같은가. 한 사람이 사회적, 정치적 지향을 형성하는 계기는 다양하다. 연령대는 정체성의 수다한 목록 중 하나일 뿐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저서 <세대 게임>. 전 교수의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대 게임'은 그에 참가한 사람들이 세대를 이뤄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활동과, 게임의 판을 짠 집단들이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해 세대를 활용하여 사람들의 경쟁이나 싸움을 부추기는 움직임을 말한다." 직접 촬영

  <세대게임>의 관점을 빌려 이 교수의 논문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눈에 띈다. 이 교수가 자리 독점의 근거로 사용하는 데이터는 임원 중 특정 세대의 비율이다. 2000년대 초반 386세대는 임원의 8.9%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 10년엔 60.3%를 차지했다. 386이후 세대는 다르다. “2010년 후반 이들의 임원 비율은 9.4%, 86세대가 ‘40일 때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이 통계만 보면 386의 대다수가 기업의 임원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임원이 된 이들은 386세대 전체 가운데에선 일부에 불과하다. 그 많던 공장노동자들은 누가 다 지웠는가. 고학생도 없진 않았겠지만 기업에 입사하고 승승장구할 기회는 대학까지 진학한 일부 386에 국한되는 얘기 아닐까.

  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세대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들의 예측은 분명 공론장의 주목을 끄는 데 도움이 된다. 딱 거기까지다.” 겉보기와 달리, 세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갈등은 표면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선 한정된 자원의 분배를 두고 집단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모든 관계에서 갈등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때론 호혜적 분배도 일어난다. 대기업 정규직인 부모는 자녀의 취업준비 기간에 용돈과 주거를 보장한다. 연금을 받는 고령의 부모가 결혼한 자식에게 주거지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현실 속 자녀는 기성세대의 자원을 공유한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에게 일방적으로 착취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작 부의 분배에서 소외된 집단은 따로 있다. 저임금과 비정규 노동에 시달리는 기성세대와 그들의 자녀들이다. 자금을 대줄 수 있는 부모를 둔 이들과 달리,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신분 상승의 가능성부터 차단된 경우가 많다. 상위 계층으로 이동할 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시를 보거나 해외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되니까. 하지만 당장 먹고살 돈도 없는 와중에 그런 상상을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상까지는 해본다 쳐도, 알바로 지친 사람에게 공부할 여력이 남아 있을까. 집값은 또 어떤가. 부모가 전셋집이라도 마련해준 청년과 보증금 없이 비싼 월세를 지불하며 사는 이는 저금 능력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부모의 영향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된다. 우리의 술자리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조은 교수가 쓴 <사당동 더하기 25>를 기억한다. 저자가 참여관찰 기법으로 금선 할머니 가족을 연구한 결과는 이렇다. 사당동 재개발 지역에서 고충을 겪다 상계동 임대아파트로 옮겨갔지만, 할머니의 가족은 여전히 빈곤을 겪었다. 특별히 게을렀거나 낭비가 심해서가 아니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낮은 임금 탓에 마땅한 탈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가족에게서 세대 간 갈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 구성원은 서로를 위하는 와중에 자연스레 가난을 이어간다. 한국 사회에서 유통되는 세대갈등론은 가난한 청년세대가 자원을 가진 일부 어른과 충돌하는 현상을 설명해줄 뿐, 존재하는 빈부격차와 빈곤의 대물림에 대해선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조은 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의 저서 <사당동 더하기 25>. 조 교수는 한 철거민 가족을 25년 동안 만나고 관찰한 끝에 이 책을 출판했다. 해당 연구는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직접 촬영.

  386세대의 자리 독점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세대 간 격차는 분명 존재하며, 386세대의 오랜 집권으로 아랫세대가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얘기는 여전히 타당해 보인다. 정체성의 차이도 엄연하다. 촛불 집회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사이엔 건너기 어려운 문화적 강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 다름을 무시하고 젊은 세대의 시각에서 노인 세대의 태극기를 멸시한다면 정치적 갈등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 다만 그 차이가 사회갈등의 주요변수라 말하기엔 꺼림칙한 부분이 많다는 얘기다. 세대는 사회갈등을 이루는 수많은 레이어 중 하나일 뿐이다.

  전 교수의 책을 다시금 들여다 본다. 극소수의 기득권층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청년과 노인과 기성세대의 삶이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청년 대 기성세대의 상상의 전쟁이 부각된다. 계급이나 젠더나 지역(국내 혹은 선진국과 후진국)과 같은 전통적인 대립은 조명받지 못하고 연령차이일 뿐인 청년 대 기성세대의 대립이 사회적 고통의 진원지가 된다.” 어쩌면 세대보다 더 시급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386의 자녀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술자리에 모였던 그때의 친구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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