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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는 책

moony1217 2021. 6. 16. 22:33

읽는 것만이 책의 쓸모는 아니다. 과거 많은 가정에서 '세계문학전집'은 집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였다. 꼭 읽지 않아도, 책은 자신의 관심이나 취향, 지적인 수준을 드러내는 기표가 된다. 실용적인 쓰임새도 있다. 지난 4월8일 조선일보는 <20년 전 '형법각론' 책 든 김진욱…법조계 "라면 받침대로나 써야">라는 제목의 온라인 기사를 내보냈다. 당일 김진욱 공수처장은 '형법각론' 책을 들고 출근했는데, 1989년 초판 발간돼 수차례 개정된 책이라 현재의 법적 쟁점을 다루기에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맞는 분석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자가 책을 어떤 용도로 인식하는지는 분명하다. 컵라면이었다면 '라면 불리는 데나 쓸 법한 책'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영화의 등장인물도 책을 다채롭게 이용한다. 책으로 사람을 때리고, 날아오는 총알이나 칼을 막는다. 책에 편지와 쪽지를 실어보내고, 암호나 메시지를 숨긴다. 추운 날 불에 태워 온도를 높이거나 음식 조리에 활용할 때도 있다. 이번 화는 영화 속 책의 엉뚱한 쓸모로 '무언가를 숨기는 도구'를 조명하고자 한다.

채드 스타헬스키의 2019년작 <존 윅 3 : 파라벨룸>은 주인공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비 오는 밤 거리를 달리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전편에서 그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두목 산티노를 뉴욕 컨티넨탈 호텔 안에서 죽여 현상범이 됐다. 영화에서 컨티넨탈 호텔은 킬러들의 은신처로, 이 안에선 아무도 죽일 수 없다는 규칙을 갖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경우 호텔 측이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가 중지되는 것은 물론, 킬러들의 손에 처형당하게 된다. 존윅의 처형이 시작되는 시간은 1시간 뒤다.

위기일발의 상황, 미친듯 달려 존윅이 도착한 곳은 뉴욕 공립도서관이다. 그는 사서에게 러시아 민담집의 위치를 묻는다. 책은 일종의 소형 금고였다. 그는 책을 열어 금화, 묵주가 달린 십자가, 펜던트 형태의 표식, 아내와의 사진을 찾는다.

금화는 암살자 세계의 화폐다. 술, 총기, 방탄 양복 등 구매부터 건물 설계도 입수, 시체 처리까지 금화로 가능하다. 십자가는 존윅이 자란 암살자 양성소 겸 극장 '루스카 로마'의 것이다. 컨티넨탈 호텔에서 파문당한 그는 디렉터에게 '카사블랑카로 보내달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잘못 도와줬다간 자신의 조직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데도 디렉터가 존 윅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을 보면 상당히 권한있는 물건으로 보인다. 펜던트처럼 생긴 표식은 약속의 징표다. 표식의 버튼을 누르면 바늘이 튀어나오는데, 이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표식 안에 지장을 찍으면 무슨 약속이든 지켜야 한다. 2편에서 산티노가 존윅에게 자신의 누나를 처리해달라며 내미는 것이 이 표식이다(그래놓고 산티노는 '누나가 죽었으면 동생이 복수를 해야지'라며 존윅을 공격했다가 복수를 당한다). 카사블랑카에 도착한 존윅은 소피아라는 킬러에게 표식을 내밀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한다.

오우삼 감독의 영화 <첩혈속집>(1992)에서 책은 총을 숨기는 금고로 쓰인다. 홍콩의 강력계 형사 데킬라(주윤발)는 홍콩 공공도서관에서 총기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피해자는 한 조직의 무기 밀매상. 입장 전 소지품 검사를 거치는데 어떻게 총을 들여왔는지 수수께끼다. 현장을 찾은 데킬라는 피해자가 총을 맞고 엎드린 책상 위에 피가 이상한 형태로 흘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무언가 네모난 물건 놓여있던 것처럼 피가 직각 테두리를 그리며 퍼진 것이다. 데킬라는 서가를 뒤지고, 이내 표지에 피가 묻은 셰익스피어 전집을 발견한다.

미리 책 안에 총을 숨겨둔 이는 한 범죄조직의 킬러 알란(양조위)이다. 해씨 파 보스 휴이의 부하인 그는 도서관 살해 사건 당시 "해숙이 왜 자기를 배신했는지 물어보라더라"고 피해자에게 말한다. 해씨 파 경쟁자인 조니 웡은 실력이 뛰어난 알란을 탐낸다. 조니는 알란에게 자신이 휴이를 공격할 테니, 막지 말고 자신의 파트너가 돼 달라고 한다. 알란을 쫓던 데킬라는 두 조직 간 싸움 현장에 뛰어들어 알란에게 총을 겨눈다. 하지만 데킬라의 탄창은 비어 있었고, 오히려 범죄자에게 형사가 죽을 상황이 됐다. 그 사실을 알고도 알란은 총을 거두고 물러간다. 그는 범죄 조직에서 잠입 수사 중인 경찰이었다.

007 시리즈 4번째 영화인 <썬더볼 작전>(1965)에는 녹음기가 나온다. 핑크색 반팔 셔츠, 하늘색 반바지 차림의 제임스 본드(숀 코너리)는 어디서 수영이라도 하고온 듯 한쪽 어깨에 수건을 걸친 채 자신의 호텔방을 향한다. 넓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하는 일은 방 협탁에 놓은 사전을 들춰보는 것이다. 절반쯤 펼친 사전 안에선 녹음기가 작동 중이고, 본드는 녹음기를 되감아 소리를 듣는다. '철컥, 뚜벅, 뚜벅' 소리를 따라 그의 시선이 문과 바닥을 향한다. 그가 귀와 눈으로 추적한 장소는 화장실, 실제로 본드는 그곳 욕실 안에서 총을 든 채 잠입한 한 남성을 붙잡는다.

당시 본드는 누군가 NATO 연습기에서 훔친 핵폭탄 2개를 찾는 중이었다. 연습기 운전자는 듀발 소령인데, 전날 사망한 채 발견됐다. 본드는 듀발의 여동생 도미노가 바하마의 휴양지 낫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곳을 향한다. 도미노는 라르고라는 남성에게 보호를 빙자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라르고는 범죄조직 스펙터의 지부장으로, 본드는 그가 핵폭탄을 탈취한 인물이라고 의심한다. 그는 적진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명작 <쇼생크 탈출>(1994)에는 싸움이나 첩보와는 무관한 장비가 숨겨져 있다.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슨)은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메인 주 주립 교도소 쇼생크에 갇힌다. 누명이지만 그는 입소 직후 강간범 보그스 패거리에게 겁탈당하는 등 평생 상상도 못한 괴로움을 겪는다. 은행가 출신으로 교도관 및 교도소장의 세금 탈루를 도와주면서 듀프레인의 생활은 트이지만(그를 괴롭히던 보그스는 간수들에게 맞아 불구의 몸이 된다) 수감 생활은 답답하다. 한낮의 막노동 이후에도 시원한 맥주를 꿈꿀 수 없고, 사방이 벽인 가운데 음악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듀프레인이 탈세의 대가로 맥주를 얻지만 한때 뿐이다. 몰래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한 부분(‘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을 틀어 봤지만 결과는 독방 수감이다.

듀프레인은 어느 날 감옥에서 담배 등 물품을 밀수해 판매하는 레드(모건 프리먼)에게 리타 헤이워드의 대형 포스터와 작은 망치를 부탁한다. 망치는 돌을 깎아 체스말을 만들기 위함이고, 포스터는 무료해서 갖고싶다고 말한다. 레드가 구해온 포스터는 듀프레인의 방 한켠 벽에 떡하니 걸리지만 그에게 세금 문제를 도움받는 간수들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듀프레인의 머리가 하얘질 때도 포스터는 같은 자리에 부착돼 있다. 리타 헤이워드가 마릴린 먼로, 라퀠 웰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 사이 듀프레인은 새로 수감된 죄수 '토미'에게서 진범이 다른 감옥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듀프레인은 이 사실을 곧장 소장에게 얘기하지만, 그를 더 이용해야 하는 소장은 토미를 으슥한 곳으로 불러 살해하고 듀프레인은 절망한다.

그리고 어느 날, 듀프레인은 아침 점호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봐도 듀프레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분노한 소장은 듀프레인이 수감된 방 안에서 그가 모은 돌을 집어던진다. 그 중 돌 한덩이가 라퀠 웰치의 포스터를 뚫고 지나간다. '왜 튕겨 나오지 않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장은 포스터를 잡아 뜯는다. 포스터로 가려둔 벽면은 사람 하나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깊이 뚫려 있었다. 듀프레인이 포스터를 구해달라고 부탁한 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벽 공사를 감추려는 의도였고, 망치는 벽을 파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듀프레인이 망치를 숨겨둔 곳은 누가 갖고 있어도 의심받지 않을 책 성경 내부였는데, 소장이 그의 성경을 펼쳐봤을 때 망치가 숨겨졌던 페이지는 이집트인의 탈출기를 그린 '출애굽기'이다.

책 속에 숨겨진 사물이 영화에서 별 역할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매트릭스>(1999)에서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낮에는 IT회사 직원, 밤에는 '천재 해커'로 이중생활을 한다. 영화 초반 해커로서 그는 자신을 찾아온 고객에게 불법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데, 이때 그가 장비를 숨겨뒀다며 꺼내드는 책은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이는 이미지 과잉의 현대 사회를 분석한 저서로, 감독 워쇼스키 자매(매트릭스 제작 당시엔 형제였는데, 둘 모두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보드리야르에게서 영화의 핵심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책은 몸을 가릴 때도 쓰인다. 장 뤽 고다르의 <사랑과 경멸>(1963) 후반부에는 까밀(브리지트 바르도)이라는 여성이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선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옷을 모두 벗어던진 채 햇빛을 즐기는데, 펼쳐진 책 한권만이 유일하게 그녀의 엉덩이를 가리고 있다. 그나마도 남편 폴 자벨(미첼 피콜리)이 다가와 책을 손에 들면서 치워지지만…. 해커의 '돈 세탁' 범죄를 그린 영화 <스워드피쉬>(2001)는 작품성보다는 할리베리가 최초로 가슴을 노출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해커 스탠리가 찾아갔을 때 그녀는 벌거벗은 채 책 한권을 읽고 있는데, 정확히 가슴 위치에 책을 올린 채 독서 중이어서 내려다보는 각도임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스탠리가 말을 걸자 그녀는 책을 내리고 대화에 응하는데….

영화에서 책은 이렇게 많은 쓸모가 있다. 시간의 흐름상 주인공의 은폐 행위가 앞서 나올 때 관객은 앞으로 저 숨겨둔 장치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 혹 누군가 책을 찾아다닐 때 숨겨둔 것이 들키지는 않을까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책이 별다른 설명 없이 덜렁 영화 초반에 등장한 경우, 후반부에서 은폐 용도로 쓰였다는 반전이 나타나기도 한다. 신체를 가리는 이유는 모르겠다. 가리는 것이 에로틱해서? 국가별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측정할 때 핵심 지표는 투명성이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지수에서 한국은 여전히 OECD 국가 가운데 하위권에 있다. 영화적 재미도 좋지만, 가림막 없는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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