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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당제를 위한 변론 - <실력의 배신>, 박남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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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당제를 위한 변론 - <실력의 배신>, 박남기

moony1217 2019. 4. 12. 00:16

 

 

  “남성 할당제로 들어온 거 아냐?” 회사 선배들이 이따금 하는 말이다. 물론 농담일 확률이 높다. 웃으며 장난이야라는 말을 덧붙이는 걸 보면 그렇다. 하지만 농담에도 근거는 있다. 예컨대 여성이 남성보다 시험을 잘 보는 것 같다는,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 실제로 언론사 입사시험 절차 중 면접이나 실무전형 장소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많이 모인다. 면접, 실무는 필기시험이란 관문을 뚫어야지만 올라올 수 있는데, 필기는 실력을 기준으로 줄을 세워 당락을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선배의 농담은 일종의 삼단논법이다. ‘남자는 여자보다 실력이 좋지 않다. 너는 남자다. 그런데도 입사하다니, 뭔가 우회로가 있는 거 아니냐.’

  외양상 농담이니 일단 웃지만, 한 번씩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가 있다. 능력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서른 하나, 신입사원으로 취직하기엔 적지 않은 나이에 나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한번 사는 인생, 원하던 공간에서 일하고 싶다는 때문이었다. 주변에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욕망대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전에 이미 한 차례 직장을 그만두었던 나다. 두 번의 퇴사는 나름 실력에 자신이 없었더라면 고르지 못했을 선택지였다. 그런데 할당제라니? ‘당장 인사팀으로 달려가서 성적표 까 보자’, ‘내가 꼴찌라고 어떻게 확신하냐같은 물음이 목구멍 위까지 차오른 때가 여럿이었다.

 

박남기 교수의 저서 <실력의 배신>. ‘실력이 있어야 시험에 합격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실력이 있으면 반드시 합격한다’는 말은 어떤가? ‘시험에 합격했으니 실력을 인정받은 거다’라는 말은 합당한가? ‘시험에 떨어졌으면 실력이 없구나’라는 말은? 직접 촬영.

 

  그렇게 홀로 씩씩대던 어느 밤엔가, 문득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미쳤다. 실력에 대한 의심은 왜 그렇게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가. 겉으로 보면 농담을 던진 선배와 나는 생각이 상충하는 것 같다. ‘너는 실력이 없다는 말과 나는 실력이 있다는 주장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사실 두 명제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실력 있는 사람만이 성공할 자격을 가진다는 전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실력의 배신>에서 박남기 교수는 이 전제를 실력주의라고 부른다.

  박 교수에 따르면 실력주의는 인기가 높다. 실력주의란 개인의 노력과 역량으로 이뤄낸 성과에 따라 사회적 재화를 배분하자는 이념이다. 능력주의와 유사하나, 타고난 능력에 노력까지 함께 고려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개념이다. 부모의 재산이나 능력에 따라 물려받는 부와 권력의 보유량이 달라지는 세습주의와 대비된다. 신분에서 해방되면서 근대인은 세습이 불공정하다는 감각을 갖게 됐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 입시에서의 부정행위, 은행권의 채용비리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부모의 능력이 아닌, 개인의 성취가 성공의 중요한 기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문제는 실력을 측정하는 기준이 명료하지 않다는 점이다. 대개 실력은 경쟁을 통해 측정되는데, 경쟁은 비유하자면 경기장의 트랙 위에서 벌어진다. 트랙 위 출발선의 위치나 반칙 여부가 공정성의 지표인 이유다. 하지만 트랙 위에 서기까지의 능력은 타고난 자질뿐 아니라 부모의 재산, 태어난 지역의 인프라 등 경기장 바깥의 환경적 요소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근육질 청년과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가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해 보자. 청년은 물론 아이보다 실력이 있지만, 그의 실력은 개인이 직접 형성한 실력 못지않게 실력 외적인 요소에 힘입은 바 크다. 경쟁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박 교수는 책에서 이른바 실력 함수와 성공 함수를 제시한다. 이 둘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 실력을 형성하는 요인은 능력과 노력만이 아니다. 둘, 실력이 있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직접 제작.

 

  그 결과 실질적 세습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박교수는 주장한다. 실질적 세습화란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사용한 개념으로, 겉으로는 실력주의가 작동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세습이 만연한 상황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이유는 명료하다. “실력주의를 통해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부모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자녀에게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재화 획득의 기준으로서 실력이 갖는 지위가 공고해져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지기까지 한다. 대학 입시 결과가 미래의 성공을 담보하는 사회에선 누구나 입시에 온갖 자원을 쏟아붓기 마련이다. 가난한 부모와 부자 부모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가 자녀를 돕는 수준이 더 높다는 사실 뿐이다. 수능 대신 학종을 도입하면? 전형이 복잡할수록 정보력을 확보하기 쉬운 부자 부모의 영향력은 커진다. 실력주의를 유지하는 한 어떤 정책을 선택해도 자녀의 실력은 세습된다. 책 제목인 실력의 배신이 함의하는 바다.

 

김상곤 전 교육부장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대학입시제도 국가교육회의 이송안을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당시 교육계에선 대입제도 공론화의 타당성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긴, 모든 정권에서 교육정책은 골칫거리였다. 출처 : 경향신문

 

  이와 같은 분석을 토대로 저자는 일견 이상한 대책을 내놓는다. “누진소득세, 최고경영진에 대한 과도한 임금 체계 개혁, 저소득층 조세 감면제도, 마이너스 소득제, 임금보호제도, 고용보호제도, 실업보호 제도, 상속세, 기부문화 확산.” 보통 이들 제도는 복지라는 카테고리에 묶이며,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쟁을 중시하는 이들로부터 역차별이라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 제도가 외려 실력주의를 제대로 성취하는 기초라고 본다. 실력주의는 현세대의 경기력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다는 전제를 요구하는데, 복지야말로 부모가 미치는 영향을 제어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교육정책을 다루는 일반적인 틀에서 벗어난 결론이다. 통상 교육계는 어떤 제도가 가장 실력을 잘 측정할까’, ‘어떤 절차가 공정한가와 같은 문제를 두고 갈등한다. 지난해 언론을 뒤덮은 학종이냐 정시냐도 같은 맥락이다. 저자는 그런 갈등이 교육정책이 매번 실패로 끝나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교육 문제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사실 사회 문제가 교육이라는 벽에 비쳐 교육 문제처럼 보이는 문제. 실력주의건 공정한 경쟁이건, 일단 불균등한 사회부터 바꿔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2017년 경향신문 창간기획 <혐오를 넘어>는 첫 기사에 사회적 소수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았다. 당시 경향신문은 “나와 우리, 사회가 함께 만연한 ‘혐오의 공기’를 걷어내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평등한 사회로 나갈 것을 제안한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왼쪽부터 차례로, 양은오·우다야 라이·이용석·조미경·김정덕·김지양씨. 출처 : 경향신문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할당제라는 말은 주로 누구를 향하는가. 적어도 나는 아닌 것 같다. 분노의 이유가 그 단어의 낯설음에 있었으니까. 좀체 생각이 풀리지 않아 종이를 꺼냈다. 회계 장부에 복식부기하듯 오른쪽 칸에 할당제라는 단어를 세워두고 왼쪽 칸을 노려보았다. 하나둘씩 단어들이 기억 저편에서 종이 위로 나타났다. 그래, 이런 단어가 있었지. 줄 하나에 빈곤가구와, 줄 하나에 여성과, 줄 하나에 지역과, 줄 하나에 장애인, 소수자. 나는 무엇인지 부끄러워, 이 많은 이름이 내린 노트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는 표지로 덮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책에는 부모의 자산과 거기서 비롯하는 세습만이 문제로 등장하지만, 사회의 불균등이 어디 부모에게서만 비롯하는가. 사회에 만연한 편견, 미약한 제도설비도 누군가의 실력 형성을 방해하는 요소다. 어렵게 가꾼 실력이 제대로 평가받을 거란 기대는 또 얼마나 갖기 어려운가. 당장 내 여성 동기들도,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런 불안을 안고 살았다 한다. 나름 고학력으로서 제법 공정하다고 알려진 시험을 준비했음에도 그렇다. 학력이나 자산 수준이 낮다면, 생활반경이 서울에서 먼 지역이라면 그 불안의 정도는 더욱 심할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약자가 경쟁하기에 녹록지 않은 사회다.

  그러니, ‘남성 할당제라는 말 함부로 쓰지 말지어다. 실력이란 잣대로만 평가하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 평평하지 않다. 할당제란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쓰다 보면 약자가 공정하게 실력을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은폐하게 된다. 실력을 제대로 측정하려면, 실력을 쌓고 평가받을 기회부터 동등해야 한다. 그런 불균형한 현실을 조정하는 도구로서 할당제는 재평가 받아야 한다.  

  헷갈리는 지점도 물론 많다. 잠정적 우선조치든 복지든 할당제든,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무엇이 필요한가. 성소수자, 혹은 지방에 거주하는 남성의 삶이 서울에 집을 가진 이성애자 여성보다 살 만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럴듯한 법안도 늘 각론에 들어서면 골치가 갈려 나가는 법이다. 다만 원칙만큼은 분명히 해 두자는 얘기다. 할당제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쓰일 때, 비로소 할당을 비롯한 온갖 사회정책의 대상이 되어야 할 누군가가 역차별운운하는 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그때 세습을 비롯한 불공정 경쟁이 지속된다는 불만이 그치고 제대로 된 실력주의도 자리잡을 것이다. 부정, 분노, 우울을 거쳐, 그렇게 나는 할당제란 말을 긍정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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