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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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담지 못한 이야기 - 뒷면

한참을 찾아 헤맨 '오래된 미래'

moony1217 2019. 6. 25. 01:13

 

  내게도 편견이 있던 게 아닐까. 수습기자로 경찰서를 출입하기 시작한 지 5주째, 서울 마포경찰서 앞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보고 시간에 맞춰 한 차례 선배와 통화를 마친 후였다. 수화기 너머 선배가 던진 질문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희씨, 보고에 나온 ‘한 마음의 집’이요. 이게 뭐예요? 탈시설 이후의 시설인가요?”
  당시 나는 정신질환자를 취재하는 데 빠져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신질환자는 주취자와 더불어 경찰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꺼내는 대화 소재였다. 경찰은 주취자가 많아서 일을 못 한다, 정작 범죄 예방에는 힘을 못 쓴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 정신질환자도 다르지 않았다. 많은 경찰이 정신질환자를 입원시키느라 날을 꼬박 새운다는 말을 건넸다. 어떻게 그 두 단어를 화두로 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엔가,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세웠다.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에는 ‘단골 손님’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단골이란 호칭이 붙은 건 그가 한달에 두세번씩 자살을 시도하기 때문이었다. 마포대교에서 자살신고가 들어올 때마다 경찰은 그를 지구대까지 끌고 와야 했다. 하지만 그뿐, 그의 반복되는 자살 시도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자신도, 그의 부모도 정신병동 입원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 라고 생각했다. 개정된 정신보건법은 정신질환자의 강제입원을 어렵게 했다. 정신질환자라 해도 인권이 있다는 명분에서였다. 환자를 돌볼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 왜 병원행을 택해야 하느냐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자살 시도가 반복되는 건 부모의 관리가 실패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저러다 단골손님이 정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문제가 이렇게 설정됐으니 나올 답은 뻔했다. ‘제한적으로 행할지언정, 어떤 경우엔 강제입원이 가능해져야 한다.’
  이후 기사를 발제할 때 비슷한 주제를 종종 꺼냈다. “선배, 외상을 입은 정신질환자는 정신병원에서 잘 안 받아준다고 합니다.” “정신질환자라 해도 술에 취해 있으면 병원에서 꺼려한다고 합니다.” 소재는 바뀌어도 지향점은 같았다. 세 줄 요약이 가능할 정도였다. 경찰에 신고 들어온 이 가운데엔 입원을 요하는 정신질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신질환 진단부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진단 인프라를 개선하즈아!

  선배의 질문은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논리를 깨뜨렸다. 정신질환자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면 어딘가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자해나 타해의 위험까지 보이는 사람을 그냥 둘 순 없지 않은가. 문제는 그 주장의 전제였다. 경찰의 말을 들을 때 나는 이미 상태가 나빠진 정신질환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는 왜 나빠지는가?
  전제가 달라지면 논리의 흐름도 바뀐다. 행실 나쁜 정신질환자에 가닿던 눈이 어느덧 아직 상태가 괜찮은 이들을 향했다. 전자가 경찰에 신고접수된 정신질환자라면 후자는 나름대로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었다. 이들에게도 강제입원이 필요하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한 주장이었다. ‘인프라’라며 뭉뚱그렸던 정신병동과 의사,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체계적 절차도 시급하지 않았다. 처음 생각했던 주제가 날이 갈수록 헝클어지는 듯했다. 기사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그렇다고 마냥 강제입원에 반대할 수도 없었다. 조현병 환자가 자꾸 사고를 일으킨다는데, 일단 병원에서 내보내고 보자고 주장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 같았다. 게다가 병원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지역사회’도 마뜩치 않았다. 경찰로부터 이미, 지자체가 운영하는 정신건강복지센터나 자살예방센터에 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후였다. 요컨대 정신질환자를 가둬두자는 주장은 맹목적이고, 곁에 두자는 주장은 공허했다. “선배 못하겠어요”라는 메시지를 카톡창에 두들겼다가 몇번을 지웠는지 모른다.
  그때 선배가 찾아준 건 제3의 길이었다. ‘한 마음의 집’은 탈병원, 탈시설로 요약되는 지역사회로의 복귀와 달랐다. 그곳에서 정신질환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다. 환자 홀로 자기 삶을 책임지는 부담이 거기엔 없었다. 그렇다고 병원이나 병동 같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자립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거기 들어올 수 있었다. ‘한 마음의 집’에서 환자들은 약물 복용을 관리받으며 언젠가 독립할 날을 대비했다. 시설은 시설이되, 격리와는 다른 또 다른 삶의 형태가 그곳에는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정신장애인 공동생활가정 '한마음의집'에서 최동표 원장(왼쪽에서 네번째)이 원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출처 : 경향신문

 

  다시 생각해봐도 쓰기 참 어려운 기사였다. ‘한 마음의 집’을 비롯해 공동생활가정의 존재까지 알게됐지만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언론에서 좀체 볼 수 없었던 유형의 공간이었다. 그 만큼 용어부터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정신보건법을 찾아 읽고 보건복지부에서 발간한 자료집을 보고 난 후에야 정신질환자를 다루는 의료 및 관리의 메커니즘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공동생활가정, 그리고 그와 유사한 몇 가지 시설을 묶어 정신재활시설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취재하면서 처음 알았다.
  더 큰 문제는 내 자신의 태도였다. 애당초 내겐 제3의 길이라는 카테고리가 없었다. 정신질환자를 두고, 풀어두거나 가둬두거나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여겼다. 되도록 풀어줘야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뒤집어 보면 ‘정확히 진단할 수 있다면 정신질환자를 격리해도 좋다’는 쪽이었다. ‘한 마음의 집’이란 단어를 보고도 단순히 보고거리로만 삼게 된 이유다. 반면 선배는 새로운 증거에 열려 있었다. 후배의 발제를 보고 취재를 지시하다가도 기사의 주제를 뒤집을 줄 알았다. 지면에 실린 기사는 그러니까, 작성만 내가 했을 뿐 사실상 선배가 찾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지면을 접하고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를 손쉽게 악마화하지 않는 보도를 늘상 꿈꾸어 왔다. 이번 기획이 격리, 탈시설 사이에 작은 교량이 되었으면.

 

추신1.
  지면에는 수정돼 나갔지만, 내가 작성한 기사의 초안은 다음과 같은 문단으로 끝난다.
  “적절한 적응 훈련이 있고 관리만 가능하다면 정신질환자들은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선 ‘병원으로 격리하자’는 주장과 ‘병원은 안 된다. 지역사회가 이들을 품어야 한다’는 주장만이 대립할 뿐, 정작 정신질환자를 돌볼 수 있는 인프라의 조성은 보이지 않는다. … 환자들의 탈시설화 이후 사회화 과정을 돕는 시설과 그에 대한 규정은 이미 예전부터 있었다. 만19년째 운영 중인 한마음의 집은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보였다.”
  격리와도 다르고 탈시설과도 다른, ‘관리’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제3의 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언론이 그 길을 조명하지 않았고, 그만큼 사람들의 눈이 거기서 멀어져 있었을 뿐이다. ‘오래된 미래’를 지켜온 수많은 전문가와 활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추신2.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정신질환에 관한 두 편의 책을 펴냈다. 하나는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강의록이다. 전자의 제목은 <광기의 역사>, 후자는 <정신의학의 탄생>이라 불린다.
  <광기의 역사>는 정신질환자들이 어떻게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게 됐는지를 시대 구분을 따라 추적한 텍스트다. 이미 초기 논문에서 푸코는 ‘격리’의 메커니즘을 분석했던 셈이다.
  <정신의학의 탄생>은 이와 다르다. 정신병원과 거기서 일하는 의사, 그리고 정신의학 연구자들이 어떻게 정신질환이라는 질병을 사회적 의제로 구성해가는지 책은 탐구한다. 그 결과 환자를 격리하는 것 못지않게 환자를 관리한다는 태도도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적절히 관리된다면 위험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내 기사의 언어는 얼마나 정당한 걸까.
  다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선 그의 마음에 가닿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배웠다. 현실은 다수와 소수 사이에 힘의 위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당위적으로는 영 마뜩치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뭔가를 얻어내려면 다수의 언어를 빌려와야 한다.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는 편견이 만연한 가운데 ‘환자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좀체 힘을 쓰지 못한다. 외려 반발을 얻기도 쉽다. ‘관리만 되면’이라는 전제는 어떠한가.

 

기사 링크

정신병원 퇴원 후, 사회생활 홀로 서기 전…“평범한 삶 함께 연습”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232206015&code=940601#csidx0c40b674638f15bb5b6a016f3ed23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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